봉헌

신학생 시절 어느 신부님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천주교가 왜 천주교인가? 하는 질문에 헌금을 낼 때 천원만 내서 천주교라는 이야기 였습니다. 재미있으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한 마음이 들었던 것을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왜 씁쓸한 마음이 들었을까?’ 그러다 보니, 더 씁쓸함이 밀려 왔던 기억이 납니다. 왜냐하면, 제가 신부님이 농담으로 하는그 이야기에 씁쓸한 마음을 가졌던 것은 다름아닌 ‘왜 다들 천원만 내시는거지? 아까워서 그러시나? 자기들 쓸 돈은 다 쓰고, 아끼지 않으면서 교회에 내는 헌금은 왜 그렇게들 아까워 하는지. 참 씁쓸하다.’ 라고 생각해서 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씁쓸했던 이유를 잘 알고 나니 더 씁쓸함이 밀려왔던 이유가 또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회에 헌금 좀 많이 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있는 제 자신을 발견해서였습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액수에 조금은 집착하고 있었다는 의미 이니까요. 그런 씁쓸한 마음을 안고 ‘주님! 저 역시도 어쩌면 세속적인 생각에 잡혀 있지 않았을까요? 헌금의 액수 보다 거기에 담긴 정성을 더 바라보고 기뻐하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미사 중 이루어지는 헌금, 곧 “봉헌”은 주님께 대한 감사와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함께 참여하겠다는 우리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봉헌에는 하느님이 아니고선 우리의 삶, 생명이 무용지물이며,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으로 인해 우리의 시간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실질적으로 우리가 그런 믿음 안에서 봉헌하는 헌금은 교회가 하는 여러가지 일들에 쓰여집니다. 곧, 하느님의 일이 쓰여질 돈을 우리가 봉헌하면서 거룩한 일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많은 돈을 봉헌 하더라도, 거기에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그 분 구원과 사랑에 나도 함께 하겠다는 의지와 믿음이 없다면, 사회에서 하는 기부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 “봉헌”의 의미를 전해주는 여러 말씀과 사건들이 나옵니다. 그 중 구약 성경에 아브라함에 자기의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봉헌하는 장면은 아주 유명합니다. 이사악은 아브라함에게 삶의 전부와 같았지만,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드리기 위해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아시고, 몸소 제물을 마련해 주셔서 이사악을 살리도록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보여준 봉헌의 모습은 하느님께 생명까지 바치는 봉헌이었습니다. 있는 데에서 조금을 떼어 어느 정도로 봉헌하는 것이 아닌, 삶의 밑바닥을 드러내며 드리는 봉헌이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것을 봉헌하는가? 아니면, 얼마나 많은 것을 봉헌하는가?는 여기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우리의 마음의 깊은 곳까지 들춰내며, 얼마나 진실되게 하느님을 믿으며, 내어드릴 수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미사를 통해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의 봉헌은 현대 생활과 더불어 다소 그 모습이 간소화 되었습니다. 화폐의 모습으로 봉헌을 하는 것입니다. 그 화폐에 우리의 삶을 한껏 담아 봉헌하는 믿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 따라 봉헌금의 액이 올라간다는 어느 개신교의 지도자들의 말은 하느님 앞에서 거짓된 것입니다. 다만, 내가 하느님 앞에서 이루는 봉헌 속에 나의 삶을 더 깊고 굳건히 담아 봉헌해드리는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동시에 교회가 하는 일에 함께 동참하며, 또 그러면서 하느님을 더욱 깊이 만나는 삶을 봉헌해 보셨으면 합니다. 미사 전 헌금을 준비하실때부터 거기에 나의 삶을 담는 시간을 보내며, 내 삶 안에 그분께 대한 희망과 믿음을 함께 담는 소중한 시간으로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